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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名畵 NUDE cont'd

MiCandy 2012. 1. 12. 13:45

루오 Rouault Georges - Henri (1871 _ 1958)



거울 앞의 娼婦
루오는 1902년 이후 무서운 정열로 일련의 창부들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많은 나체의 창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의 고달픈 삶의 탓일까? 모두가 노기(怒氣)가 서린 표정들이다. 이 작품 역시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은 전연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드가나 로트렉도 나부를 많이 그렸지만 화면에서 풍기는 냄새가 전연 이질적으로, 루오 특유의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娼婦
창부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정면으로 대하는 이 창부는 하반신의 넓은 요부(腰部)가 인상적이다. 머리를 만지고 있는 상반신과 양팔의 움직임이 매우 동적(動的)이다. 무릎 아래로 신고 있는 검은 양말은 화면의 안정감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로테스크한 맛을 풍기고 있다. 그의 나체화 중에서도 두드러진 소묘력을 보여 주고 있는데, 풍기는 인상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부
1925년경 캔버스 유채 80X60Cm 스위스 개인 소장


모딜리아니 Amedo Modigliani (1884 _ 1920)



카리아티드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위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裸婦
이 작품의 원명은 <큰 나부>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의 독자적이고 유니크한 선맥의 흐름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며 대신 나부의 얼굴 표정으로 구성이 집중된다. 여체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이 여성은 알몸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 싶으며 서로 다른 구형(球形)의 모임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 하고 있다.



앉은 나부
NU ACCROUPI 1916년 캔버스 유채 92X60Cm 런던 대학 부속 미술연구소 소장


달리 Salvador Dali (1904 _ 1989)



잠깨기 직전 석류 주위를 한 마리 꿀벌이 날아서 생긴 꿈
허공에 뜬 채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여인, 달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갈라'이다. 망망한 바다, 단애의 절벽, 포효하는 호랑이, 그 호랑이를 삼키고 있는 물고기, 그리고 잘 익은 석류, 그 주위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꿀벌, 이러한 것들이 균정된 짜임새와 더불어 극적 율동감을 자극한다. 긴총 끝에 달린 칼날은 여인의 팔을 찌르듯 시선을 자극하며, 배경 속의 베르니니의 코끼리가 오벨리스크와 교황의 상징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코끼리는 가장 깊은 의식 속의 고백에 대응키 위하여 최대한의 높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갈라는 꿀벌 소리에 바늘의 아픔을 느끼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작품은 달리가 전형적인 꿈에 대한 프로이트적 발견을 처음으로 영상화 한 작품이다.



자신의 순결을 뿔로 犯하게 될 젊은 처녀
1945년부터 1950년대에 걸쳐 달리의 창조적 지성은 돌연한 이변을 가져온다. 급속한 발전을 보인 원자물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비약적 전개가 시작된다. 원자폭탄의 발명에 큰 충격을 받고 원자물리학, 양자역학 등에 관심을 둔 그는 물질간의 불연속성에 흥미를 느꼈다. 전자나 원자핵을 연상케 하는 코뿔소의 뿔 모양을 그렸는데, 그것은 완전한 대수나선형(對數螺旋形) 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그것들은 공중에 떠올라 서로 유리되면서 다이내믹한 구성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무소의 뿔은 순결의 상징이다. 전설 속의 뿔 짐승인 무소의 뿔인것이다. 규방 처녀와 같은 이 여인은 뿔에 매달려 뿔과 도덕적으로 조화율을 이룬다.'고 달리는 말하고 있다.

위 자료는 청소년세계 www.youth.co.kr 에서 만든 것을 인용 편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뭉크 Edvard Munch (1863 _ 1944)



마돈나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이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 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 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 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징한 듯한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입맞춤
이 주제는 목판화, 유화 등에서도 잘 표현 되어지고 있기는 하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선에 의한 담백한 효과를 특징있게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향한 눈과 마음은 상식성을 벗어난 인간화된 깊은 존재의 엄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창가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애무하고 있는 나체상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추구한 가운데 각각 다른 개성적인 면을 개척한 영역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상황은 에로틱한 장르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에로틱한 행동에서 개별성을 제거한 상태로 변화시켜 양성의 만남의 보편적 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판법에 의한 기법으로 드라이포인트, 에칭, 애쿼틴트 등을 결합한 혼합 방법에 의한 표현 효과를 갖고 있다.



죽음과 소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 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精蟲)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原型)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마라의 죽음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黨) 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을 공격했으나 지롱드 당에 동조한 샬로트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외에도 여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아담과 이브>, <삼손과 데릴라> 등의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욕을 겪게 되는데, 1902년 오스가르스트란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멱감는 남자들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이런 약한 것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이 크게 그 약함의 탓이므로 나의 병을 고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바르네뮌데 트리프틱 >(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가 있었던 북 독일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가운데 한 가운데의 성인(成人)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두 장은 <청년>과 <노인>이다. 그 당시 무질서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예술 작품은 결정(結晶)같은 것이다. 결정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도 역시 영혼과 광휘(光輝)를 내뿜는 힘을 가져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정확한 외관(外 觀)의 면(面)이나 선(線)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뭉크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무렵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로서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 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청순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빨간 깔개 위에 손을 짚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휴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붉은 색면이 강렬하다. 회화의 형식으로서의 붉은 색채가 아니라, 지향하는 욕구로서의 정신을 존재시켜 주는 독특한 형상을 느끼게 한다.



등의자( 藤椅子) 곁에 선 裸婦
바르네뮌데에서 1907-8년에 쓴 글 중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온다. 예술은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29년에 에켈리에서 한 말 중 '색이나 선이나 면에 의해 재편성을 재현하는 일이 예 술이나 회화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의 표출을 항시 주장하였던 것이다.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마티스 Matisse Hemi (1869 _ 1954)



화실의 裸婦
1898년에서 99년에 걸쳐 파리에는 새로운 미래적 조형에 열을 띤 젊은 화가들이 아카데미즘에서 근대 회화에로의 최초의 돌파구로서, 인상파적인 화풍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거기에서 각자 자기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리더격으로, 런던으로 신혼 여행차 건너가서 터너를 연구하고, 시냑의 논문 '들라크로아에서 신인상파주의까지'를 읽는 등, 색채의 실험을 거듭했다. 이 작품도 당시의 프레 포비즘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부의 거의 빨간 색채와 그 배경의 강렬한 초록의 대조에 의하여, 점묘풍의 화면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화면은 격렬한 터치로 되고, 순수한 색채에 의존한 화면 구성을 하려는 마티스의 시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豪奢
마티스에 있어서 포비즘의 시기는 1905년 부터 8년까지의 짧은 기간동안이었고, 그 이후 차츰 '균형과 순수함과 그리고 조용함'의 예술로 전환되어 간다. 그 무렵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진정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의 '화가 노트'에 적고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의 담채(淡彩)처럼 미완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엷게 처리되어 있다. 색채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억제되어 있고, 그 대신 마티스는 자연계의 속에서 나부가 나타내는 움직임을, 한순간 사이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곡선 속에 포착하려 하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 그는 색채보다 극히 단순하게 데포르메된 데생에 의하여 한순간의 자연과 인간과의 상관 관계를 생명있는 영원성에 부각하려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상태가 빚는 약동감이 화면을 흐르고 있다.



푸른 나부




댄스
그의 <음악>이라는 작품과 함께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졌다.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서, 활기 있는 리듬과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푸른 하늘과 언덕의 초록으로 색면 대비를 이룬 배경 속에 다섯 명의 춤추는 댄서들이 손을 마주 잡은 형태는, 생명적인 무한을 갈망하는 암시적 무의로서 화면에는 유동하는 활기로 차 있다. 그것들은 마치 아라베스크 무늬로 화면 전체를 꿰뚫는 어떤 생명적 통일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 색채는 단지 세 가지로, 격렬함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어, 마티스 자신이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르와 등가(等價)의 것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벽무늬 속의 장식적인 인물
이 작품은 니이스에서 지중해적인 밝은 광선과 색에 도취하여 그린, '평안과 우아의 예술'을 위한 그의 작풍(作風)을 이루는 그림이다. 여인의 몸매는 직각이 서로 교차하는 직선을 중심으로, 견고하고 힘찬 형태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화면은, 그가 좋아하는 장식적 요소를 가득 채워 호화스럽고 사치한 조용함이 있는 기념적인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았다. 이 작품에 있어 그는 확실히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힘과 장대(壯大)함의 세계에 새로운 창이 활짝 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을 이룬다. 바닥에 놓인 카페트의 비스듬히 그어진 직선의 연속은, 벽에 장식된 꽃무늬와 아라베스크의 선과 충돌되는 듯하지만, 그 대조가 한층 마티스가 노리는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고, 더욱 힘있는 화면 효과를 이루게 하고 있다.




1930년대의 마티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은 벽화 <댄스>였다. 이 그림은 1931 년부터 33년 사이에 제작한 <댄스> 가운데의 춤추는 나부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단순한 구도에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색조로 나타낸 이 작품은, 대담하고 커다란 화면으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팔과 머리로 형성된 역삼각형은 그 형태를 따라 순환하는 운동감과 조용히 잠자고 있는 여인의 정적인 모습이 서로 모순된 양상으로 느껴지게 한다. 지금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피부처럼, 상기된 분홍의 살빛에 가늘고 부드럽게 그어진 윤곽선, 바닥에는 바둑판 무늬를 이룬 짙고 옅은 푸른색이 맑게 얼룩져, 깊은 잠에 빠진 젊은 육체를 받들고 있다.

위 자료는 청소년세계 www.youth.co.kr 에서 만든 것을 인용 편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잔 Cezanne Paul (1839 _ 1906)



들라크로아의 메데
들라크로아가 몇 점의 유화로 제작한 <노란 메데>에 의한 자유 모사이다. 낭만주의 거장의 작품과의 상이 점은 첫째 동굴 밖의 푸른 공간이 왼쪽 상하를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다음에 밖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메데의 왼쪽 어깨의 뒤쪽을 비추는 빛의 노란색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생략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 수채화의 화면이 아래위로 길다는 이유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메데의 새파랗게 타는 분노와 복수심이 하얀 피부와 양다리를 싸고 있는 옷과 단검의 푸른색들로 잘 묘사되고 있다. 동굴 안벽을 묘사한 터치도 어둡게 엉켜있고, 여인의 분노에 타는 살기 돋친 감정과 잘 일치되고 있다. 지금 이장면이 사랑하던 두 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려 하는 장면인 것이다.



목욕하는 세 여인들
여인들이 목욕하는 주제는 세잔이 즐겨 택한 것이다. '주제에서 모티브로, 상상되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으로'라는 근대 회화의 움직임에서는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나 색채상으로는 역시 인상파 그것이며, 이 작품에 있어서도 청록의 짙은 색채가 매우 규칙적으로 삐딱하게 놓여져 있다. 전경인 지면이나, 풀, 수면은 터치가 옆으로 놓여져 있으며, 멀리 약간 보이는 푸른 하늘은 터치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좌우로 선 나무들이 피라밋 형으로 화면의 틀로서 작용한다. 그 중 두 여인은 물 밖에서 앉아 있기도 하고 선 채로 타올을 쥐고 있기도 한다. 중앙의 한 여인은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 서있다. 세 사람의 머리는 각양각색으로서 인체와 풍경의 조화가 매우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마티스가 애장(愛藏)하던 작품이다.



목욕하는 여인들
세잔의 수채화에는 유화를 습작과 유화에서 독립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후자에 속한다. 수채화는 세잔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만년에 이를수록 수채화는 유화와 대등한 질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데생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세잔의 화법은 쿠르베나 밀레, 모네, 피사로보다도 그 폭이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몇 사람의 여인들이 풀밭 위에 자유롭게 배치돼 있고, 중앙의 한 여인은 물에서 올라오고 있다. 왼쪽에는 화면을 이어 붙인 자국이 있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인체와 수목이 더 그려져 있어 몇 번이고 고쳐 그어진 윤곽선의 움직임이 보다 아름다운 리듬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적절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목욕하는 남자들
최근에 인상파 미술관으로 옮겨온 이 작품은 수많은 < 목욕하는 남자들> 중에서도 총 결산이며, 최고의 걸작이다. 세잔 개인적으로는 졸라와 같이 소년 시절 아르크 강에서 놀던 기억으로 연결된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몇 개의 인체들을 구성하여 화면을 만든다는 서양 회화의 전통적인 발상법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겠다. 르노와르의 목욕 군상도와 더불어 세잔의 그 많은 목욕도 들은 근대 서구의 화가들이 과거의 전통을 어떻게 자기화하여 생기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냐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수직으로 치솟은 강 건너편의 나무들, 그리고 멀리 가깝게 느끼면서도 분명한 형태의 인체와 부정형의 수목들과 결정적으로 화면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하늘의 흰 구름. 갖가지 대립하는 요소가 이렇게도 혼연 일체가 되어 높은 통일감을 주는 예는 다르게 찾아 볼 수 없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드가 Edgar Degas (1834 _ 1917)



몸치장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도 나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성스러운 것이면서도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체는 조각상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예외의 경우도 보인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여인의 나체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기색을 보이던 사람들도 대리석의 조각에 대하여는 이를 찬미하였다. 이 나상(裸像)은 목욕 후 하녀에게 머리 치장을 맡긴 채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흔히들 드가는 르노와르처럼 여체의 탐욕스러운 느낌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입욕
인상주의의 마지막 전람회인 제 8회 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만년의 드가는 무희들의 연작에서처럼 목욕하는 여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데, 그는 이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은 탁자 옆의 둥근 욕조 속에 여인이 구부린 상태로 들어 앉아 몸을 씻고 있는 모습이며, 대리석의 탁자 위엔 화장과 관련된 소도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포착된 이 작품은 여체의 유연한 곡선과 욕조의 둥근 형태와는 상호 조화를 이룬다. 그렇지만 예리한 단면을 보이는 탁자 가장자리의 선과는 극심한 대조를 보인다. 평면으로 전개된 탁자 위에 몇 개의 기물들이 없다면 마치 분리된 별개의 평면처럼 보일 것이다.



아침의 入浴


위 자료는 청소년세계 www.youth.co.kr 에서 만든 것을 인용 편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